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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이야기

[하회탈(국보 121 호)]

[하회탈(국보 121 호)]
- 우리나라 최고 오래된 탈 ; 류희걸 저 **




[1] 백정탈


경상북도 안동군 하회마을과 그 이웃인 병산마을에 전해 내려오는 탈로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탈놀이 가면이다.

하회탈로는 11개가 전해지는데 주지 2개, 각시, 중, 양반, 선비, 초랭이, 이매, 부네, 백정, 할미 탈이 있다. 이밖에 총각, 별채, 떡다리 탈이 있었다고 하나, 분실되어 전하지 않는다. 병산탈로는 2개가 남아 있다.

한국의 가면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아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 해 탈놀이가 끝난 후 태워버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하회탈과 병산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탈이며, 격식과 세련됨을 갖춘 유물이다.

원래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거행되는 별신굿에 쓰이던 것이며, 마을마다 따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만 아니라 탈에 대한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했다.
이 탈의 재료는 오리나무이며 그 위에 옻칠을 두겹 세겹으로 칠해 정교한 색을 내고 있다. 턱은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할 때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되어 있다.
하회 가면 중에서도 특히 양반과 백정은 세련된 입체감과 표현기교를 보여주고 있다.
이 탈들의 제작자와 제작연대는 알 수 없으나 마을에는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이 있다. 다만 하회마을에 살았던 사람에 대한 기록으로 허씨가 살았고, 안씨 집안이 들어온 후, 유씨가 조선 전기에 살았다고 기록이 되어 있어 대체로 고려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여진다.







[2] 이매탈





[3] 부네탈





[4] 양반탈



[5] 선비탈





[6] 중 탈



[7] 초랭이



[8] 할미탈


[9]각시탈



[전문설명]


안동군(安東郡) 풍천면(풍川面) 하회(河回)마을과 병산(屛山)마을에서 전승되어 오는 것으로서 현존하는 한국(韓國) 최고(最古)의 탈놀이 가면(假面)이다.

한국(韓國)의 가면(假面)은 대개 바가지나 종이로 만든 것이 많고, 따라서 오래 보존된 예가 드물며, 그해 탈놀이 끝난 후 태워 버리는 유습(遺習)까지 있었다. 그러나 이 하회(河回)탈과 병산(屛山)탈은 드물게 보이는 목조(木彫)라는 점과 또 탈놀이 가면으로서 드물게 보이는 격식과 세련을 보인 가장 고격(古格) 있는 유물이다.


원래 해마다 정월 대보름에 거행되는 별신(別神)굿놀이에 쓰이던 것이며, 부락에서는 따로 동사(洞舍)를 세워서 가면들을 보존해 왔을 뿐더러, 이 탈에 대한 금기나 제약이 매우 엄격했었다. 9종 외에 떡달이·별채·총각의 3종이 더 있었으나 일인(日人) 삼파선길(三波羨吉)이라는 자가 빼앗아 간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 가면들의 재료는 모두 오리나무이며, 원래 설채(設彩)했었고, 턱이 따로 조각되어 있어서 아래턱을 노끈으로 달아 놀이할 때 움직이게 함으로써 생동감을 주도록 되어 있다. 하회가면(河回假面) 중에서도 특히 양반과 백정은 세련된 입체감과 표현기교를 보여 주고 있다.

이 탈의 제작연대를 밝힐 자료는 현재 없다. 그리고 병산(屛山)탈 갑(甲)·을(乙) 2면(面)은 병산동(屛山洞)에서 전래되어 오던 옛 가면을 하회동(河回洞)에 옮겨서 함께 보존해 온 것으로서, 가면 이름도 짐작할 수 없었다. 다만 이것도 오리나무 조각이며, 하회(河回)탈과 함께 모두 대륙에서 전래된 민속신앙 가면의 양식을 남겨 준 것으로 간주된다


[국보 121호]

하회탈을 돌려다오


<문화유산 제자리에>


[진품 하회탈 사진(각시탈)]


[탈공방에서 만든작품(각시)]
[글: 초대 민속박물관장 류희걸]



<국제탈춤페스티발>이 열리기 시작한지도 벌써 5회를 넘었다. 해마다 이맘때면 안동시가지는 온통 하회탈로 뒤덮히고 각국의 탈춤들이 속속 들어와 시민들은 축제 분위기에 고조되어 야단 법석들이다.

안동에 <탈춤 페스티발>을 유치한것은 오로지 세계적인 걸작품 하회탈[별신굿]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진품 하회탈은 정작 고향을 떠나 객지에서 망향(望鄕)의 한

을 않고 있는 것도 모른채 비슷한 모조탈로 축제를 즐긴다는것은 그야말로 김빠진 맥주맛이 아닐수없다.

하회탈은 1964년에 국보[제121호]로 지정됨과 동시에 당국이 임의대로 가져가 지금은 국립박물관에서 36년이란 긴세월을 홀로 수장(收藏)고에 잠자고있다.

그것도 아무나 볼 수 조차 없는 칠흑같이 어두운 밀실(密室)이니 말이다.

차제(此際)에 이를 고(告)하여 사연(辭緣)과 경과(經過)를 알림으로써 안동시민들의 공감(共感)대를 형성하고 따라서 범시민운동을 벌려서라도 반드시 하회탈을 찾아올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감히 이글을 쓴다.

문화유산(文化遺産)이란 오늘에 사는 우리가 잘 보존하여 후손들에게 물려줄 귀중 한 민족적 자산(資産)임에는 틀림이 없다.

주지하는 바이나 노파심(老婆心)에서<문화유산이 무었이냐 ?>고 물어본다면. 먼저 문화(文化)부터 설명 되어야 할 것이다.

<문화란 인지(人智)가 깨고 세상이 열리어 밝게되는 것이다. 또 문화는 권력이나 형벌보다 문덕(文德)으로 백성을 가르쳐 이끄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문화는 인간이 자연 상태에서 벗어나 일정한 목적 또는 생활이상(生活理想)을 현실하려는 활동의 과정과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룩해낸 물질적 정신적 총칭(總稱)이다.

특히 학문. 예술. 종교. 도덕등 인간의 내적(內的) 정신활동에서 생겨난 소산(所産)이 바로 문화이다 > 라고 설명된다.

그래서 우리는 그 소산에서 남겨진 모든 유형물(有形物)들을 문화유산(文化遺産)이란 개념으로 오늘날 소중하게 다루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들 문화유산을 효율적으로 관리(管理)하기위하여 문화재 보호법을 제정하고 중요한 것은 국보(國寶)나 보물(寶物)로 또는 유형에따라 여러형태의 문화재(文化財)로 지정하여 까다로운 절차와 규제(規制)까지 해두고 있다.

<문화재는 원형을 변경할수 없다.><문화재는 새로 만들 수 없다 > <문화재는 연고지 밖으로 반출할수 없다> <문화재는 전문가만이 보수할수 있다> 이는 문화재 보호법에서 가장 근간(根幹)을 이루는 대목이다.

그렇다 문화재는 형태(形態)를 바꾸어도 않되지만 연고지 밖으로 옮겨서는 더욱 않된다.

그런데 안동의 하회탈은 국보로 지정하던 64년도에 하회(河回)에는 완벽한 보관(保管)시설(施設)이 없다는 이유로 당국[문화재관리국]이 임의로 국립박물관에 가져가버렸다.

자고(自古)로 만물은 각기 제자리가 있는 법이다. 농산물에도 특별한 산지가 있는까닭에 유명하듯이 문화유산 또한 마찬가지다.

이럴테면 석굴암(石窟庵)은 경주에있고

경복궁(景福宮)은 서울에 있어야하며 또 촉석루(矗石樓)는 진주. 광한루(廣寒樓)는 남원(南原)에 있어야 구실을 제대로 할수 있다는 이야기다.

만약 서울에다 석굴암을 이전하고 경주에는 경복궁을 옮겨 놓는다면 그것에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

문화유산이란 갈곳 못갈곳을 생각하지않고 무조건 안전하게 보존만 하면 된다는 발상은 잘못된 사고(思考)라 하겠다.

이러한 맥락(脈絡)에서 볼 때 올바른 문화유산의 보존이란 바로 그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한다. 그래서 하회탈이 서울에 보관되고 있다는 것은 잘못된 문화유산 보존책의 일단면이라고 지적할 수 밖에 없다.

하회탈은 우리나라 현존 목조(木造)가면(假面)으로서 가장 오래된 고려시대의 것으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매년 정월보름 성황당(城隍堂) 동신제를 올린뒤 하동들이 놀았던 별신굿에 사용되었던 것이다.

당초에는 12개였으나 3개는 분실되고 나머지 9개와 병산탈 2개를 합쳐 국보 제121호로 지정되었다.

신의 계시(啓示)로 허도령이 만들었다는 전설 만큼이나 그 제작 수법이 독특하여 연기자가 의도하는대로 희.노.애.락의 표정이 잘나타나 세계적(世界的)인 걸작(傑作)으로 그 예술성은 높이 평가되고 있다.

아울러 별신굿 탈놀이는 1980년 중요무형 문화재 제69호로 지정되어 행사때마다 공연(公演)은 물론이고 영국 버킹검 궁전에서 또 미국 대통령 취임 행사장에까지 공연하여 우리 전통문화의 우수성을 세계만방에 알리는 획기적인 역할을 다 하고 있다.

그래서 <국제 탈춤페스티발>이 안동시에 유치되어 국가의 5대 중요행사중 하나로 추진되고 있는 것이다.

학자들은 하회탈춤을 일러 놀이에는 오락기능이 있고 제의(祭儀)에서 주술(呪術)성을 강조하며 연극으론 예술성을 나타낸다고 학술적인 표현을 하지만 이는 한마디

로 <하동들이 양반을 욕(辱)보이는 놀이다>라고 쉽게 말할수 있다.

양반을 모독하는 놀이가 어찌해 하회마을에서 전승되었고 또 지체높은 하회양반들은 그것을 왜 수용(收容)했을가 ?

우리는 이점을 중시(重視)하면서 놀이가 주는 의미(意味)를 음미(吟味)해 볼 필요가있다.

당시 엄격한 조선조 계급사회하에서 양반들은 호랭이 담배만 피울줄 알았지 하동들의 설음을 좀처럼 이해하려고 하질않았다.

그러나 하회의 양반들은 그렇지를 않았다는 점이 주목된다.

놀이에는 일정한 대사가 있긴 하지만 연기자가 즉흥적으로 상전에 모독(冒瀆)하는 언행을 하더라도 이를 탓하지 않고 오히려 자아(自我)반성(反省)의 계기로 삼았다.

평소 나는 저들에게 무었을 잘못 대하였는가를 반성하고 관용(寬容)을 베풀어 그들로 하여금 탈춤추는 오늘 하루 만이라도 쌓였든 스트레스[stress]를 풀게 해줌으로써 후일 보다더 강한 복종심을 자아내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하동들은 탈춤에의한 불만의 허구적(虛構的) 해소(解消)로 사회의 갈등(葛藤)과 저항(抵抗)을 억제했고 양반들은 하동들의 고닳픈 삶을 폭넓게 이해함으로써 상하간 조화있는 마을 공동체를 형성할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대동성(帶同性)의 획득은 오늘날 우리들이 익히 본받야할 하회 사람들의 지혜(知慧)라고 하겠다.

이렇듯 중요한 의미가 듬뿍 서린 하회탈이 지금와서는 안동을 대변해주는 하나의 심볼[symbol]이 되었다.

책의 표지라든가. 상품의 선전포스타. 방송타이틀까지도 탈을 앞세우고 또 소형 하회탈 마스코트[mascotte]는 관광기념품으로 큰몫을 차지하고 있다.

그럼에도 하회탈이 안동에 없으니 진품을 한번도 보지못한채 만든 탈을 어찌 원형에 가깝다고 믿을 수 있겠는가 ? 혹자는 <가짜탈>이다. 아니면 <모조 탈>이라고까지하며 온갖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있어 하회탈이 지닌 볼래의 의미가 퇴색되어 가고있으니 안타깝기만 하다.

앞에서 언급한 것 처럼 문화재 관리국이 말한 안동에 보관시설이 없다는 이유가 지금은 설득력이 없어졌다. 하회마을 관리소란 공공기관이있고 또 탈박물관도 있으며 안동시내에는 안동시립민속박물관의 완벽한 시설이 있기 때문이다.

하회는 국가중요 민속마을로 국내관광객은 물론 외국인들이 많이 찾는곳이다. 특히 작년에는 영국여왕 <엘리자베스 Ⅱ>이 다녀간 뒤로 주말이면 하루에도 수천명의 많은 인파가 쇄도(殺到)한다.

그런데도 하회에서 진품 하회탈을 볼수 없다면 외국사람들이 우리의 문화정책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 결과는 자명(自明)해진다.

하회탈을 중앙에서 보관하면 완벽한 보존책이되고 마을 주민이나 지방 박물관이 보관하면 보존상 우려가있다는 사고방식은 시대착오다.

내가아니면 안된다는 전근대식 사고를 이제는 과감하게 떨쳐 버릴때가 되었다.

차제에 하회탈을 천년에 가깝도록 보존할수있었던 전승력은 과연 어디에 있었던가를 생각해보자. 그것은 결론적으로 말해서 주민들의 절대적인 신앙의 대상물이였기 때문이다.

1936년 7월경 조선 총독부에서 하회의 동사(洞舍)는 고려시대의 건물이라하여 문화재 지정을위해 실측(實測)한바가있다. 그무렵 3일 뒤 동사에 불이났다. 그곳에는 탈이 보관되어 있었으므로 사람들은 동사보다 탈이 불에 타는 것이 더 염려(念慮)되어 <서낭님의 노여움을 어떻게 하느냐 ? >하면서 걱정을 했다.

그때 누군가가 불덩이 속으로 용감하게 뛰어 들어가더니 탈이든 궤짝을 안고나왔다.

그래서 동사는 소실되었어도 탈만은 아무런 이상이 없었다는 이야기다.

만약 탈이 보관된 박물관에 불이 났다면 누가 그처럼 애타게 건지겠는가. 모르긴해도 탈도 함께 타고 말았을 것이다.

이런점을 미루어보아 지식과 과학에의한 보존보다 순수한 민간들의 신앙에의한 종교적 주술적(呪術的) 보존력이 더 강하다는 것을 알수가있다.

이와같이 목숨보다 소중하게 여겨왔던 하화탈은 문화재로 지정한다는 명목하에 서울로 거져간 것이 꼭 36년. 그것도 명확한 보관증 하나없는채 말이다.

언젠가 동민들이 탈을 돌려달라고 진정서를 냈다가 완벽한 보관 시설이 없다는 이유를 적은 어설픈 회시문만 받았을 뿐이라고한다.

이제와서 하회마을 사람들은 그 회시문조차 분실하고 없으니 이러다가는 소유권마져 흐미해져 결국은 재산권 시비로 관민간 송사(訟事)가 우려된다.

그렇지만 하회탈은 어디가도 하회탈이다. 또 누가 뭐라해도 하회탈이다.

발상지(發祥地)인 하회마을에 탈을두고 모두가 볼수있도록하여 그것으로 하여금 하회의 역사를 이해하고 전통문화를 배워갈수 있도록 해야함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이는 하회마을 주민은 물론 안동인 모두의 임무요 권리인 것이다.

비근한 예이긴하나 강능의 정동진이 모래시게 하나로 그렇게 발전되고 관광자원화되었다싶이 우리 안동은 그 유명한 우리의탈 국보 121호 하회탈이 온다면 획기적인 관광자원이 될것임은 명약관화(明若觀火)한 사실이다.

당국은 하루빨리 탈을 하회마을로 돌려주어야 한다. 안동시민들의 거센 반발이 있을땐 어떻게 할것인가 ? 민심이 천심이다.

지방화 시대를 외면해서는 절대로 않된다.

문화재를 해외로 반출(搬出)함을 막는것도 중요하지만 국내 연고지(緣故地)밖으로 이동 또한 심각(深刻)하게 생각할줄 알아야 할 것이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제구실을 다할 수 있다. 이길만이 우리의 문화유산을 바르게 보존하고 가꾸는 첩경(捷徑)이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