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1. 1. 4. 무개화차에 몰린 피난민들 |
흥남에서 철수가 무사히 성공할 무렵, 서울이 위치한 서부전선은 중공군에게 38선까지 밀렸다.
그럴 즈음 북위 38도선을 중심으로 방어진을 치고 전의를 불태우던 워커 장군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순직하고 만다. 흥남철수가 막바지에 이른 12월 23일, 그는 서울 미8군 지휘소에서 의정부 북방전선으로 가던 길이었다. 적군과 대치하고 있던 미 제24사단을 격려하고, 그 사단에 소속된 외아들 샘 워커 대위의 무공훈장 수여식에도 참석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장군이 탄 지프가 의정부 축석령에서 우리 국군 트럭과 충돌하는 바람에 현장에서 사망했다.
훗날 한국 정부는 1963년 4월 서울 광장동 야산 자락에 미군 휴양시설과 국립호텔을 신축하고 워커 장군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워커힐(Walker Hill), 즉 '워커의 언덕'으로 명명했다. 지금은 민간기업 소유가 된 셰라톤 그랜드 워커힐 호텔의 명칭에 관한 유래다. 크리스마스를 이틀 앞둔 날(12.23), 워커 중장이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그는 한국전쟁동안 가장 어려웠던 시기인 낙동강 전선을 막아낸 용장군이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리지웨이 중장이 임명되었다.
리지웨이는전략가로 이름나 있었다. 콜린스 육군참모총장과 웨스트포인트 동기였다. 브래들리가 참모총장의 임기를 끝내고 후임을 물색할 때 그는 가장 유력한 총장 후보였다. 그러나 그의 두 번 이혼, 세 번 결혼, 정책부서의 근무경험 부족이 불리하게 작용해 콜린스 장군에게 밀렸다. 그는 참모차장에서 워커의 사망으로 맥아더의 요청으로 사령관이 됐다.그는 곧바로 전선으로 날아왔다.
미8군사령관으로 부임한 리지웨이는 부대 현황과 적정을 파악도 하기 전에 중공군의 3차 공세를 맞아 서울을 내주고 37선에서 재편성을 했다. 이때 전선은 오산∼여주 이남∼제천북쪽∼단양∼삼척을 연하는 선이었다. 그는 이제까지 독자적으로 운영된 미10군단을 미군에 배속시킨 후 예하의 한미 5개 군단을 전 전선에 배치해 상호 협조된 작전을 수행했다. 그는 서부전선에 미군 2개 군단을, 중부전선에 미군 1개 군단을, 중동부·동부전선에 국군 2개 군단을 배치했다. 이때 미군은 기계화부대의 기동이 보장받는 서부·중서부전선을 담당했고, 국군은 산악지형인 중동부·동부전선을 맡았다. 하지만 유엔군의 한반도 철수론이 나온 가운데 전개된 이 시기 전황은 한국에 낙동강 방어작전에 이은 '제2의 위기'
였다.
1950년 11월 24일. 당시 6·25전쟁에 참전한 미 8군은 대대적인 북진작전을 펼쳐 크리스마스 때까지는 전쟁을 종식 시킨다는 '크리스마스 대공세'를 개시했다. 이를 진두지휘한 장군은 앞서 말한 초대 미 8군사령관 월턴 워커 중장. 맥아더 유엔군총사령관과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단행해 전세를 반전시키고, 그에 앞서 한반도 공산화 저지의 마지막 보루였던 낙동강 전선을 지켜낸 명장이었다. 그러나 한때 가능할 듯도했던 크리스마스 대공세는 11월말 중공군의 전면 공세로 무산됐고, 오히려 미군과 국군 주력부대는 세계 전쟁사상 가장 큰 규모라는 굴욕적인 해상철수를 단행할 수 밖에 없었다. 중공군에 포위된 미군 3개 사단과 국군 1개 사단이 12월 중순부터 2~4일 간격으로 흥남에 집결, 해상을 통해 후퇴한 이른바 '흥남철수'작전이 아니던가.
1951년에 접어들면서 중공군 6개 사단의 공격이 더욱 거세졌고, 서울이 중공군에게 곧 함락당할 것이라는 소식이 있자, 12월 24일 이승만 대통령은 서울 시민에게 피난령을 내렸다. 그러자 30만 서울 시민들 대부분이 피난길에 나섰다. 痛恨의 피난길이었다. 결국 51년 1월 5일 중공군이 서울에 침입하고말았다. 3개월여 만에 서울을 다시 적들에게 빼앗겼다.
▲ 1951. 중공군의 침공으로 서울을 떠나는 1.4 후퇴 피난길 행렬.
서울 광진구에 있는 워커힐 호텔의 '워커힐'이란 이름은 월턴 H 워커 미8군사령관에게서
유래한다.
자신의 외아들을 한국에 바친 미 8군사령관도 있다. 워커 사령관과 리지웨이 사령관에 이어 부임한 제임스 어워드 밴플리트 8군사령관(51~53년 한국 근무)은 자신뿐 아니라 아들 지미 밴플리트 중위도 한국전에 참전했다. 그러나 52년 4월 밴플리트 중위는 폭격기를 몰고 북한 쪽으로 비행하다 실종됐다. 그해 부활절 밴플리트 사령관은 한국전에서 아들을 잃은 부모들에게 “ 벗을 위해 자신의 삶을 내놓는 사람보다 더 위대한 사랑은 없다”는 전문을 보냈다. 그는 전역 후에도 사재를 털어 한국 육사에 도서관을 기증했다. 육사 교정엔 그래서 그의 동상이 서 있다. 그는 57년 뉴욕에서 한·미 우호 증진을 위한 코리아 소사이어티를 창설하기도 했다. 코리아 소사이어티는 매년 그의 이름을 딴 밴플리트상을 한·미 관계 증진에 기여한 인사에게 수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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