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 중앙통신사 부사장으로 있으면서 조선노동당 대남사업총책 이효순으로부터 위장월남 귀순하라는 지령을 받고, 1967년 3월 22일 판문점에서 열린 군사정전위원회를 취재하다가 하오 5시경 회의가 끝나자 재빨리 UN군측 대표인 준장 밴 클러프트의 승용차에 뛰어올라 극적인 탈출에 성공함으로써 월남 귀순하였다. 한국정부는 그가 북한의 언론계 거물이며 지식인이라는 점을 감안하여 그를 대대적으로 환영하면서 주택과 정착금을 지급하고 결혼까지 주선하는 등 행복한 생활을 영위할 수 있도록 보살펴 주었다.
그러나 그는 전국순회강연 및 TV·라디오 방송을 통하여 북한실정을 폭로하는 척하면서 한국의 각종 기밀을 수집하여 당시 베트남 기술자로 자신의 이질(姨姪) 배경옥 편에 수집된 기밀을 소련을 통하여 북한으로 보내려고 꾀하였다. 그의 여러 가지 행동이 점차 수상해지자 한국정부의 정보 및 수사당국에서는 그를 주시하고 경계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이 이상 한국에 있을 수 없음을 눈치채고 배경옥과 함께 위조여권을 만들어 비행기로 탈출, 홍콩·방콕을 거쳐 호치민에서 북한으로 귀환하려다 한국정부의 정보요원에 의하여 체포, 군용기편으로 압송되어 재판을 받고 1969년 7월 3일 사형이 집행되었다.
귀순 당시 탈출에 걸린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탕' '탕'…. 따갑게 귓전을 울리는 총소리를 뒤로 한 채 그가 탄 차는 남쪽으로 향했다. 그렇게 하나의 감옥을 탈출한 그는 더 무서운 감옥에 갇혔다. 북한 언론계의 거물급 인사였던 그는 대대적인 환영을 받았다.
1000만 원이 넘는 정착금과 고급 주택이 주어졌고 가는 곳마다 엄청난 환대와 찬사를 받았다. 인기 여가수와의 염문도 불거졌고 대학 교수와 결혼해 화제를 모았다. 중앙정보부의 판단관으로 채용될 때만 해도 그의 앞길은 활짝 열린 듯했다.
그는 자유를 찾아 월남했지만 완전한 자유의 몸은 아니었다. 감시는 계속됐고, 체제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행사에 동원돼 ‘자유대한 만세’를 외칠 때마다 터져 나오는 함성 속에서 회의를 느끼는 듯했다. 강연회나 기자회견에서 김일성에 대한 비판을 피하는 듯한 모습을 보이면서 그는 중앙정보부의 의심을 샀다.
1969년 1월 27일 그는 또 한 번의 탈출을 감행한다. 가발과 콧수염을 붙이고 위조여권을 소지한 채 처조카인 배경옥 씨와 김포공항을 빠져 나간 그는 홍콩을 경유해 베트남 호찌민 떤선녓 공항에 도착했다. 다시 캄보디아로 가려던 그는 1월 31일 중정 요원들에게 체포돼 서울로 끌려 왔다.
'새까만 눈동자의 이수근/그래도 콧수염 붙이고/홍콩 가는 비행기를 잡아타다/멋있게 사로잡혔네/이북의 김일성아 들어라/남한의 예비군이 어떠냐/이번에 3차대전 일어나면은/김일성 목을 베리라.'
당시 아이들의 노래에까지 등장했던 이수근은 6개월 뒤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배 씨는 위조여권 제작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은 뒤 21년을 감옥에서 보내고 1989년 12월 출소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