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시평] 상처뿐인 교육감의 귀환
[중앙일보]입력 2012.01.26 00:00 / 수정 2012.01.26 00:00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곽노현 교육감이 돌아왔다. 왕의 화려한 귀환인가, 패장의 우울한 귀환인가. 그가 출근하던 날 서울시교육청에서 벌어진 아수라장을 보면, 호산나 소리를 들은 금의환향은 아니다.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의 몸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형량의 형평성을 묻고 싶다. 돈을 준 사람은 벌금형인데 돈을 받은 사람은 징역형이다. 돈을 준 경우에는 선의(善意)가 있었고 돈을 받은 경우에는 악의(惡意)가 있었다는 것이 이유다. 똑같은 돈인데, 어떻게 준 돈은 ‘착한 돈’이고 받은 돈은 ‘나쁜 돈’일까. 돈을 준 사람은 강도를 당한 경우처럼 피해자고 돈을 받은 사람은 강도처럼 가해자이기 때문일까.
과연 법의 세계는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인가 보다. 아닌 게 아니라 카프카의 『심판』에 나오는 ‘법원의 우화’는 사뭇 시사적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법원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지기는 불문곡직 막아 선다. 하도 문지기가 완강하니 시골사람은 그가 방심하는 틈에 법원에 들어가려고 한다. 눈치 빠른 문지기는 일갈한다. 자신의 눈을 피해 법원에 들어갈 수 있을진 몰라도 막상 그 안에는 직급도 높고 무시무시한 문지기가 많아 곧 끌려나오게 되어 있다고. 결국 시골사람은 왜 자신이 법원에 들어갈 수 없는지 영문도 모른 채 법원 앞에서 숨을 거둔다.
아! 우리는 법원 앞의 시골사람처럼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 하나. 정말로 묻고 싶은 게 있다. 같은 돈을 주고받았다면 쌍벌죄가 상식인데, 왜 벌금형과 징역형으로 갈리는가. 자살하겠다는 사람을 돕겠다는 긴급부조 정신이 갸륵해서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도’를 따지기도 하고 ‘결과’를 따지기도 한다.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면 괜찮지만 불일치할 땐 문제가 된다. 중환자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질주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었다면 선한 의도임에도 처벌을 면할 수는 없다. 물론 종교처럼 결과보다 의도가 중시되는 영역도 있다. 거액을 희사했어도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자선의 의미는 퇴색된다.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는 손을 칭송하는 것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했다는 의도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사회의 많은 행위는 의도보다 결과에 무게를 둔다. 이번 사건에서 선거를 고리로 돈을 주고받은 행위는 그 결과가 중대한데 돈 준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돈 받은 사람과 형량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커야 하는가.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 돈 약속을 선거 당사자가 몰랐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친구를 왕따시켜 자살하게 만든 사건을 보라. 가해자는 말한다. 왕따를 한 게 그토록 나쁜 짓인 줄 몰랐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엔 무지가 죄악이 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성희롱 행위를 하고도 죄가 되는 줄 몰랐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판사는 곽 교육감이 돈 약속을 알았다는 증거를 검찰이 제출하지 못했다고 탓한다. 하지만 공직선거법의 정신을 보면 안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선거후보자의 배우자나 사무장이 돈봉투를 돌린 것이 발각돼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후보자는 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당선무효가 되는 것도 연대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판결은 인지 여부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연대책임은 묻지 않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곽 교육감을 싸고도는 진보진영에도 말하고 싶다. 그의 복귀를 실로 다행이라고 치부하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가재는 게 편이 아니던가. 그러나 진영논리에만 매몰되면 까마귀도 백로가 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보수가 찍은 교육감이 부패하면 악행이 되고 자신들이 만든 교육감이 부패하면 선행이 된다면,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속언이 생각날지언정 어떻게 정의의 엄숙성을 새길 수 있는가. 정의와 도덕은 정녕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기 위한 비수에 불과한 것인가. 곽 교육감이 벌금형을 받았다고 하나 공직무효형의 30배에 해당하는 중벌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에 필요한 건 “우리가 남이가” 하는 값싼 의리가 아니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곽 교육감에게 권고한다. 그대는 유죄판결을 받은 공직자다. 그렇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개혁은커녕 교육감 직무를 행할 수 없다. 교육이란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는 천직인데 어떻게 죄가 있다는 혐의를 넘어 판정을 받은 교육계의 수장이 “꿋꿋한 마음으로” 직무에 임할 수 있겠는가.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법교육을 하기 위해 직무에 복귀하는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부디 결단하라. 바로 그것이 교육에 대한 본인의 진정성은 물론 진보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길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488/7209488.html?ctg=2002&cloc=joongang|home|opinion
[중앙일보]입력 2012.01.26 00:00 / 수정 2012.01.26 00:00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곽노현 교육감이 돌아왔다. 왕의 화려한 귀환인가, 패장의 우울한 귀환인가. 그가 출근하던 날 서울시교육청에서 벌어진 아수라장을 보면, 호산나 소리를 들은 금의환향은 아니다. 유죄판결을 받은 죄인의 몸이 아니던가.
그럼에도 형량의 형평성을 묻고 싶다. 돈을 준 사람은 벌금형인데 돈을 받은 사람은 징역형이다. 돈을 준 경우에는 선의(善意)가 있었고 돈을 받은 경우에는 악의(惡意)가 있었다는 것이 이유다. 똑같은 돈인데, 어떻게 준 돈은 ‘착한 돈’이고 받은 돈은 ‘나쁜 돈’일까. 돈을 준 사람은 강도를 당한 경우처럼 피해자고 돈을 받은 사람은 강도처럼 가해자이기 때문일까.
과연 법의 세계는 일반인들의 상식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신비의 세계인가 보다. 아닌 게 아니라 카프카의 『심판』에 나오는 ‘법원의 우화’는 사뭇 시사적이다. 시골에서 올라온 사람이 법원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문지기는 불문곡직 막아 선다. 하도 문지기가 완강하니 시골사람은 그가 방심하는 틈에 법원에 들어가려고 한다. 눈치 빠른 문지기는 일갈한다. 자신의 눈을 피해 법원에 들어갈 수 있을진 몰라도 막상 그 안에는 직급도 높고 무시무시한 문지기가 많아 곧 끌려나오게 되어 있다고. 결국 시골사람은 왜 자신이 법원에 들어갈 수 없는지 영문도 모른 채 법원 앞에서 숨을 거둔다.
아! 우리는 법원 앞의 시골사람처럼 영문도 모른 채 죽어가야 하나. 정말로 묻고 싶은 게 있다. 같은 돈을 주고받았다면 쌍벌죄가 상식인데, 왜 벌금형과 징역형으로 갈리는가. 자살하겠다는 사람을 돕겠다는 긴급부조 정신이 갸륵해서일까. 우리는 살아가면서 ‘의도’를 따지기도 하고 ‘결과’를 따지기도 한다. 의도와 결과가 일치하면 괜찮지만 불일치할 땐 문제가 된다. 중환자를 병원에 데려가기 위해 질주하다가 교통사고로 사람을 치었다면 선한 의도임에도 처벌을 면할 수는 없다. 물론 종교처럼 결과보다 의도가 중시되는 영역도 있다. 거액을 희사했어도 이름을 알리기 위한 것이라면 자선의 의미는 퇴색된다. 구세군 냄비에 돈을 넣는 손을 칭송하는 것은 왼손이 하는 일을 오른손도 모르게 했다는 의도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치사회의 많은 행위는 의도보다 결과에 무게를 둔다. 이번 사건에서 선거를 고리로 돈을 주고받은 행위는 그 결과가 중대한데 돈 준 의도가 선하다고 해서 돈 받은 사람과 형량의 차이가 하늘과 땅만큼 커야 하는가.
또 하나의 의문이 있다. 돈 약속을 선거 당사자가 몰랐다는 것이 그토록 중요한가. 친구를 왕따시켜 자살하게 만든 사건을 보라. 가해자는 말한다. 왕따를 한 게 그토록 나쁜 짓인 줄 몰랐다고. 그러나 그렇다고 책임을 면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엔 무지가 죄악이 되는 경우가 수없이 많다. 성희롱 행위를 하고도 죄가 되는 줄 몰랐다고 해서 면책되는 것은 아니다. 판사는 곽 교육감이 돈 약속을 알았다는 증거를 검찰이 제출하지 못했다고 탓한다. 하지만 공직선거법의 정신을 보면 안다는 사실이 그렇게 중요하지 않다. 선거후보자의 배우자나 사무장이 돈봉투를 돌린 것이 발각돼 100만원 이상의 벌금형을 받으면 후보자는 인지 여부와 관계없이 당선무효가 되는 것도 연대책임을 묻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이번 판결은 인지 여부에만 초점을 맞춘 나머지 연대책임은 묻지 않고 있으니 어찌 된 일인가.
곽 교육감을 싸고도는 진보진영에도 말하고 싶다. 그의 복귀를 실로 다행이라고 치부하는 심정은 이해가 간다. 가재는 게 편이 아니던가. 그러나 진영논리에만 매몰되면 까마귀도 백로가 되는 희한한 일이 벌어진다. 보수가 찍은 교육감이 부패하면 악행이 되고 자신들이 만든 교육감이 부패하면 선행이 된다면, “남이 하면 불륜이고 자신이 하면 로맨스”라는 속언이 생각날지언정 어떻게 정의의 엄숙성을 새길 수 있는가. 정의와 도덕은 정녕 상대방의 가슴을 찌르기 위한 비수에 불과한 것인가. 곽 교육감이 벌금형을 받았다고 하나 공직무효형의 30배에 해당하는 중벌이다. 그러니 진보진영에 필요한 건 “우리가 남이가” 하는 값싼 의리가 아니라 ‘읍참마속(泣斬馬謖)’의 정신이 아니겠는가.
마지막으로 곽 교육감에게 권고한다. 그대는 유죄판결을 받은 공직자다. 그렇다면 그 사실만으로도 개혁은커녕 교육감 직무를 행할 수 없다. 교육이란 사람을 바르게 인도하는 천직인데 어떻게 죄가 있다는 혐의를 넘어 판정을 받은 교육계의 수장이 “꿋꿋한 마음으로” 직무에 임할 수 있겠는가. 대법원 판결이 나기 전까지는 무죄라는 법교육을 하기 위해 직무에 복귀하는 것이 되어서는 곤란하다.
부디 결단하라. 바로 그것이 교육에 대한 본인의 진정성은 물론 진보의 도덕성을 보여주는 길이다.
박효종 서울대 교수·윤리교육과
http://joongang.joinsmsn.com/article/488/7209488.html?ctg=2002&cloc=joongang|home|opin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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