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며칠 전 저녁 무렵 집 근처였다. 한 택시기사가 길가에 차를 세운 채, 어두컴컴한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왠지 안쓰러운 맘이 들어 지나던 길가의 편의점에 들어가 캔커피를 하나 사서 가던 길을 되돌아 그 택시 앞으로 갔다. 택시기사는 이미 식사를 끝낸 후 차 밖으로 나와 있었다. 그에게 다가가 말없이 캔커피를 건네줬다. 그는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고맙다는 인사와 함께 캔커피를 받아들었다. 그는 묻지도 않았는데 “기사식당 밥값 5000원을 아끼려는 것은 아니고 발에 통풍이 심한 탓에 식당 밥을 먹을 수 없어 늘 도시락을 싸갖고 다닌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택시기사의 고달픈 하루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 “낮 12시30분쯤 나와 새벽 4시까지 이틀씩 일하고 하루 쉰다. 하루 벌이는 대략 20만원 정도. 한 달에 20일가량 일할 수 있으므로 외형상 한 달 벌이는 400만원. 하지만 가스비만 하루 6만원 넘게 든다. 그나마 정부보조금 20%를 제해도 5만원 정도는 든다. 한 달치를 계산하면 100만원이 가스비다. 여기에 조합비 내고 걸핏하면 말썽인 차량 수리비 등을 합하면 한 달에 기껏해야 200만~250만원이 수중에 떨어진다. 이걸로 5인 가족이 살겠나.”
# “10년 전 외환위기 때 의류 수출업체에서 부장대리로 근무하다 회사를 나왔다. 그 후 회사택시를 운전해 6년 만에 겨우 개인택시 얻어 4년째다. 택시운전 10년 하면 자동으로 병신된다. 택시 운전한 사람치고 위장 멀쩡한 사람 없다. 변비는 기본이고 전립선도 뭉개진다. 내 경우 통풍은 택시 운전하기 전부터 있었지만 혈압·위장·전립선은 택시 몰면서 다 망가졌다. 종합병원이 따로 없다. 혈압약·혈전약·심장약·위장약 등 온통 약으로 버틴다.”
# “영업용 차량은 8년 이상 운행 못한다. 그나마 1년은 연장 운행할 수 있어 억지로 끌고 다닌다. 내년엔 어쩔 도리 없이 차를 바꿔야 한다. 하지만 차 바꿀 돈은 수중에 없다. 그렇다고 핸들 놓으면 아파트 경비원밖에 할 게 없다. 내 나이 53세다. 옴짝달싹할 수 없는 나이다. 그래서 보험설계사로 맞벌이하는 아내 눈치만 보고 있다. 아내가 상전이다. 그나마 아내가 벌지 않았으면 우린 이미 쪽박찼다. 그래서 이틀 일하고 하루 쉬는 날도 설거지며 집안 청소며 내가 다 한다. 도시락도 물론 내가 싼다. 그나마 큰딸 대학 보내는 것은 순전히 아내 덕이다. 고2짜리 작은딸, 중3짜리 아들까지 가르치고 대학 보내려면 나도 아내도 버텨야 한다. 그래서 통풍 아니라 더 심한 것이 있어도 핸들을 놓을 수 없는 거다.”
# 미국발 금융위기로 나라 안팎이 어수선한 이때 개인택시 기사 이씨의 말에는 울분이 배어 있었다. 그래도 개인택시라도 하면 웬만큼 사는 것 아니냐고 사람들이 생각하던 때가 있었다. 하지만 옛날 이야기다. 물론 이씨 역시 한때는 중산층의 가장이었다. 그러나 지난 10년의 세월 속에서 그는 점점 가라앉았다. 그리고 이제는 다시 일어설 기력조차 잃었다. 그저 아이들 클 때까지만 버티자는 오기만 남았다.
# 물론 이씨보다 더 힘들고 어려운 사람이 훨씬 많다. 그들에겐 리먼브러더스가 무너지고 주가가 어떻고 환율이 어떻고 하는 것은 먼 나라 이야기다. ‘차라리 더 무너지고 더 엉망돼서 있는 것들도 당해봐라’는 생각이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누가 이들의 울분을 달래줄 건가. 시장이, 나라가, 대통령이? 답이 없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있는 사람들이 ‘악!’ 소리 낼 때 없는 이들은 이미 소리없이 죽어 있다는 사실이다. (정진홍 논설위원)
어느 택시기사의 울분 [중앙일보]
[만물상] 치매의 과학
조선일보 김동섭 논설위원
"약속이 있는데 몇 시에 어디서 만나기로 했더라?" 이러면 건망증이다. "뭐라고! 난 그런 약속한 적이 없는데"라고 하면 치매에 따른 기억장애일 가능성이 높다. 치매환자더러 시계를 그리라고 하면 분침이나 초침을 못 그리는 경우가 많다. 치매는 '기억력 저장 창고'인 뇌의 1000억개 신경세포 뉴런이 서서히 죽어가면서 생기는 질병이다. 뇌기능을 손상시키는 70여 가지 질환 모두가 치매 원인이 된다.
▶뇌세포가 왜 죽는지 과학자들은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다만 유전자에 이상이 생기면서 잘못된 단백질이 만들어져 뇌세포를 죽인다고 추측할 뿐이다. 문제는 치매의 50~60%를 차지하는 알츠하이머병이다. 다른 원인의 치매들은 일찍 발견하면 치료나 예방 할 수 있지만 알츠하이머는 아직 치료제가 개발되지 못했다. 알츠하이머는 베타 아미노이드라는 단백질 독성 물질이 뇌에 쌓여 신경세포가 죽으면서 발생한다.
▶과학자들이 지금껏 알아낸 것은 이 병에 걸리면 학습능력과 기억에 중요한 뇌의 신경전달물질 아세틸 콜린이 감소한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콜린을 늘리는 도네페질, 엑셀론 같은 약물들이 나왔지만 2~5년 증상만 완화시킬 뿐이다. 미국 제약회사들은 최근 독성물질 베타 아미노이드를 제거하는 치료제 개발에 주력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조만간 이 치료제에 대한 임상실험이 실시될 예정이지만 아직 획기적인 치료제로 볼 수 없다는 의견이 많다.
▶알츠하이머를 고칠 수 없다면 환자의 일상생활을 돕는 방법이라도 찾자는 움직임이 있다. 미 조지아공대는 노인들이 약 복용을 잊지 말도록 약 주변에 빨간 불을 깜박이게 하거나 디지털 음성으로 알려주는 미래 주택을 연구하고 있다. 환자가 입는 컴퓨터를 착용하면 거기 달린 비디오 카메라가 환자의 시야에 든 사물을 포착해 무엇인지 말해 주도록 하는 프로그램도 거론된다. IT 뉴스사이트 '와이어드(Wired)'는 이를 '기억 안경'이라고 불렀다.
▶알츠하이머병은 1907년 독일 정신과 의사 알츠하이머가 학계에 보고한 이래 21세기 최대 역병(疫病)으로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 우리만 해도 치매환자가 지난 5년 새 두 배로 불어나 40만명이 됐다. 가족을 포함해 적어도 150만명이 치매에 볼모로 잡혀 있다. 어제는 보건복지부가 정한 '치매 극복의 날'이었고 내일은 '세계 치매의 날'이다. 치매와의 전쟁에서 지면 인류의 삶의 질은 곤두박질치고 말 것이다.
漢字는 지식소통의 디딤돌
한자어 이해 위해 해독능력 필요
근대 이래 문체의 변화가 거의 없던 서구의 젊은이는 앞선 세대가 남긴 지적 성과에 접근하는 데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않았다. 반면 한글전용을 실시한 1970년 이래 한자 앞에서는 낫 놓고 기역자도 모르는 문맹으로 전락하고 만 우리 젊은이들은 한자를 섞어 쓴 부모세대가 남긴 지적 유산에 접근하기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이때부터 앞뒤 세대 사이에 말이 아니라 글로 주고받는 고급 지식의 전수는 거의 불가능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무심코 쓰는 한자어의 대부분은 메이지 시대 일본 지식인이 만든, 역사가 그리 길지 않은 신조어다. 국민(國民) 국회(國會) 육법(六法) 정당(政黨) 시간(時間) 공간(空間) 철도(鐵道) 은행(銀行) 병원(病院) 과학(科學) 등 무수한 어휘를 일본에서 만들었다.
한 세기 전 한자를 활용해 서구 근대의 개념을 번역해 들이는 데 골몰한 일본 지식인과 달리 동시대 우리 선각자들은 그렇게 하지 못했다. 미국과 일본에서 대학교육을 받은 윤치호는 “내 생각을 표현할 어휘가 한국어에는 아직 부족하다”며 서구 근대 문명적 단어를 영어로만 익히고, 이를 동포와 함께 나누기 위해 우리 언어로 표현하는 번역 작업에 나서지 못하는 한계를 보였다.
그러나 일조권(日照權) 혐연권(嫌煙權) 난개발(亂開發) 등 날마다 쏟아져 들어오는 새로운 개념과 현상을 표현하는 데 여전히 일본산 신조어를 거리낌 없이 빌려 쓰는 오늘의 우리가 그를 나무랄 수는 없는 법이다. 한자교육을 받지 않은 대학생에게는 차라리 영어 원서가 이해하기 어려운 한자용어로 가득 찬 번역서보다 훨씬 더 살가운 것이 현재 우리의 슬픈 자화상이다. 세계화의 광풍이 몰아치는 오늘날 영어능력은 두말 할 나위 없이 중요하지만 그것만이 생존의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몇 해 전 거리마다 죽 늘어서 장작구이 통닭을 팔던 트럭이나, 두 집 걸러 한 집꼴로 들어섰던 조개구이 집과 찜닭 집을 기억해보라. 남 따라 하기만으로는 경쟁시대를 살아갈 수 없다. 아이디어의 빈곤은 남의 정신적 창조물을 거리낌 없이 흉내 내는 ‘짝퉁’만을 양산한다. 서구 사람이 그들의 정신적 보고인 고전에 별 어려움을 느끼지 않고 드나들 수 있는 데 반해 우리는 그렇지 못하다.
조기교육,失보다 得많아
그렇다면 우리는 항상 남의 뒤꽁무니만 쫓을 수밖에 없다. 문화전통은 영감과 독창적 아이디어의 원천이다. 우리 청년세대가 한자를 알게 될 때 전통시대 한문으로 쓰인 전통문화의 보고인 우리 고전을 섭렵하지 못하더라도 국한문혼용 세대가 남긴 서책에 남은 편린의 지혜라도 끌어 쓸 수 있다.
동아시아 공동체를 외치는 세계화의 시대에 한자를 쓰고 읽을 줄 아는 것만으로도 중국과 일본에서 반은 문맹을 면할 수 있기에 한자 조기 교육은 실보다는 득이 훨씬 더 많다. 만시지탄의 감이 있지만 이번 한자교육 재개는 그간의 과오를 성찰해 지식과 정보가 소통하는 사회로 가는 길에 놓인 징검다리의 첫 번째 디딤돌이다. 한글전용과 국한문혼용을 둘러싸고 벌어진 해묵은 논전은 이제 그쳐야 하지 않을까?(허동현 경희대국제캠퍼스학부대학학장 한국근대사-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