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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식이야기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에게

The Mission

Yo-Yo Ma, Cello / Ennio Morricone, dir
Roma Sinfonietta Orchestra


야만의 땅 라틴 아메리카에 진리를 전하고자 하는 산 크를로스 선교회

소속의 가브리엘 신부 몇 동료 신부들의 죽음으로 결국 험악한 지형의

폭포수 위에 사는 과라니족들을 선교하는 데 성공한다.

용병 출신의 원주민들을 팔아버리는 야만적인 행동을 서슴없이 하는

노예상 로드리고자신의 부인과 동생이 서로 사랑함을 알고 격분해

결국 동생을 죽이고 만다.


그는 그런 식민지적 잔혹성에 반성을 했다기 보다는 동생을 죽였다는

죄책감으로 가브리엘 신부를 따라 사죄의 길을 걷는다.

과라니족은 자기의 형제를 팔아 넘긴 로드리고를 용서하고 로드리고는

브리엘을 도와 원주민들만의 복음으로 가득찬 왕국을 건설하려 한다.

하지만 교황청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이권 다툼에 끼여 보금의 땅을

초토화 시키는 것을 묵인하고 만다.





-성품과 인간형이 서로 상반된 예수회의 두 신부, 가브리엘 로드리고

신부는 바로 '기독교적 사랑'과 '사회적 정의'라는 선택의 기로에 선

주인공들 이었다.

그들은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영토 분쟁 속에 있는 과라니 족을 카톨릭

따르는 포르투갈로부터 보호하고자 한다.

원주민들과 함께 피땀 흘려 이룩한 선교구가 예수회와 포르투갈의

관계를 염려한 교회에 의해 악명 높은 노예 제도를 합법화한 포루투갈

왕의 식민지에 편입되자, 이들의 희생은 불가피하다고 느껴원주민들

에게 그들의 땅에서 떠나라고 말한다.




마침내 로드리고는 청빈, 정결, 순명, 그리고 교황께 순종이라는 예수회

4가지 서원 중에서 순종의 맹세를 버리고 원주민들을 위한 명예로운

죽음을 택한다.

이 때 가브리엘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자네 손을 피로 물들이면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네. 자네는 하나님께

목숨을 바쳤잖나. 하나님은 사랑이야."





가브리엘 신부는 평화 주의자이지만능동적인 힘을
발휘하려 한다.

인디오들과의 생활 이후 가브리엘 신부는 교회에 대항하는 힘을 자신의

내부에서 발견한다.가브리엘 신부는 무기를 쥐지는 않지만 인디오의

마을을 떠나라는 교회의 명령을 거부한다. 가브리엘 신부는 교황청의

철수령에 회의를 느끼고 마지막까지 신이란 무엇인가를 외치며 방황

한다. 그는 마침내 신앙의 힘은 바로 사랑이라는 해답을 얻은 뒤에 무기

없이 싸움에 나선다.




전투에 나서기 전 축복을 구하러 온 로드리고에게 가브리엘 신부는

이렇게 말한다.
"할 수 없소. 당신이 옳다면 하나님이 지키시겠지, 하지만 옳지 않다면

축복은 무의미해. 무력이 정당하다면 사랑이 설 자리는 없어집니다.

틀림없이 그럴거야. 나는 그러한 세상에서는 살아갈 힘이 없어집니다.

축복도 할 수 없소, 로드리고."




마침내 스페인 군대의 막강한 화력과 병력 앞에 하나씩 쓰러져가는

원주민과 사제들. 그리고 복음의 땅은 불길로 휩싸이고 만다.

살아남은 과라니 족의 아이들이 모여서 폭포의 더 높은 상류로 올라가는

마지막 장면은 추기경의 숨진 두 신부와 원주민들에 대한 독백과 요한

복음 1장 5절 끝맺고 있다.
"표면적으로는 신부 몇몇과 과라니 족의 멸종으로 끝났고 저는 살아남

았습니다. 그러나 저는 죽고 그들은 살았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죽을

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영원히 산 자의 기억 속에 남아있을 겁니

다."



"이 어둠을 비추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요 1:5)

로드리고가브리엘 두 사제 모두 카톨릭교가 가난한 자와 억압받고

있는 자를 구원하고 해방시키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는 점에 있어서는

일치된 견해를 보이고 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사랑과 사회적 활동을

어떻게 조화시키는가 하는 문제가 두 성직자들을 괴롭히고 마침내

각각 다른 순교의 길을 걷게 만든다.

과연 어느 쪽이 더 설득력이 있을가? 복음의 진리와 정치적 참여 사이

에서의 선택은 로드리고가브리엘 신부의 비극적인 순교가 있은 지

1세기가 지난 오늘 날에도 여전히 현대의 많은 성직자들을 괴롭히

딜레마로 남아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신부님들께.....





저는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정의구현사제단의 "정의"가 무언지를 잘모르겠습니다.
더구나 정의가 있어야 사랑이 있다는 말씀도 이해가 가지를 않습니다.



이 또한 성경에 대한 옳바른 해석인가요?




삼성,


달라져야합니다 그들도 잘한것 없습니다,


그러나 제 생각으로는 이 단계에서 사제단도 그만 일선에서 물러서야 할 때가 온것 같습니다.




충분히 사회적 공감을 일으키는 불쏘시게 역할은 하셨습니다.


이 이상 끌고 가시면 추해질 염려가 있습니다.


천주교회도, 인격도, 그리고 사상까지도.....




사제단님 !


왜 북한의 세습, 인권 등에 대해서는 말이 없으신지요 ?


남한에 대한 "정의"와 북한에 대한 "정의"가 다르신가요?



왜 과거 정권의 퍼주기는?


퍼주는 것이 정의요 인도적 사랑이라면


핵으로 되돌아 오는 이 우리의 생존의 위협은 무엇인가요?




6공 황태자의 1000억대 비자금,


김대중 선생님의 거액의 해외 자금(?),


전두환 노태우 전대통령들의 천문학적인 비자금,




삼성이 부패해서 정치가 정치인이 부패했을까요?
과연 노무현 대통령도 삼성 돈 없이 봉하에 거대한 성을 구축했을까요 ?



향후 지켜볼 일이지만.....




천주교도들의 헌금 과연 깨끗한 돈들만일까요?
사제님들의 봉급 무슨 돈일까요?



근로소득세 내신 적 있으신지요 ?




작금의 비리 과연 삼성뿐일까요?


다른 그릅은 ? 기업들은?
의사, 변호사 등등 모두 정당하게 자산을 축척하고 있는것일까요 ?





절대로 삼성을 두둔하는 것이 아닙니다.



구조적인 비리를 놔두시고 삼성만 두둘기는 이유가 알고 싶을 뿐입니다.
더구나 구토가 날 것같은 그 김모변호사의 인간적 행태를 볼모로 하면서 말입니다.





그 변호사는


성경에서 예수 인가요 아니면 유다인가요 ? 아니면 무슨 선지자인가요?


이또한 사제단님의 정의 구현을 위한 하나님의 역사이신가요?




사제단님!


저희들은 그 변호사를 무어라 불러야 옳은 것입니까?




교회의 과거 비리를 모두 양심고백하고 폭로하는 신부님이 계시다면 교황청은 묵인하실까요?


천주교 교황청의 과거를 사제단님이 잊으신것 은 아니겠지요


그 음모와 살육과 배신의 역사를.....




이제 그만하시지요.
이제 이 문제의 해결은
사제단의 신부님들의 "정의"가 아니라 "사회적 정의"에 맡겨두시지요.



제발,,,,,,,,,,,,(모신 글))


[문창극칼럼] ‘평화구현 사제단’을 기다린다 [중앙일보]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이 또 폭로를 했다. 이번은 새 정부에 들어간 인사들이다. 지난 대선 직전에도 비슷한 폭로가 있었다. 삼성특검도 그들의 폭로가 발단이 되었다. 모두 한 뿌리인데 쪼개어 발표를 하고 있다. 하늘의 일을 한다는 사제들이 벌이는 일인지라 함부로 시비할 수가 없다. ‘정의 구현’이라는 명분이니 더욱 그렇다. 더욱이 사제단의 일에 시비를 거는 것은 곧 삼성을 감싼다는 등식이 성립될 수 있으니 누구도 나서기를 주저한다. 그러나 삼성의 잘못은 잘못이고 사제단의 문제는 사제단의 문제다. 사제단이라 하여 성역을 누릴 수만은 없다.

정의구현사제단은 1974년 유신을 반대하던 지학순 주교가 구속되는 것을 계기로 결성된 사제들의 단체다. 그 시절 이 단체는 어둠 속의 한 줄기 빛이었다. 87년 박종철 고문사건 폭로에도 역할을 했다. 누구도 나서지 못하던 시절에 사제들이 몸을 던졌다. 그래서 존경을 받았다. 세월이 지나며 사제단의 활동도 변화했다. 사제단의 홈페이지에 기록된 대표적 활동을 보면 문규현 신부와 임수경양의 평양 방문,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한 단식기도, 언론개혁, 새만금 개펄 살리기 삼보일배, 송두율 교수 무죄 석방 기자회견, 김현희 KAL기 폭파 진상 규명, 반전 평화미사…. 하나같이 우리 사회에 이념적 갈등을 몰아온 사안들이다.

베네딕토 교황은 지난해 11월 신도와 사제들을 향한 두 번째 교황회칙에서 교회의 현실참여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기독교는 피흘리는 사회혁명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는 바라바(빌라도가 예수를 체포한 대신 놓아준 사람)같이 정치적 해방을 위해 싸우지 않았습니다. 예수는 스스로 십자가에 못박힌 사람입니다.” 그는 해방신학에 대해서도 다른 기회에 이렇게 비판했다. “우리에게 해방신학은 필요치 않습니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순교의 신학입니다.” 기독교의 핵심은 희생이라는 말이다. 간디는 ‘원칙 없는 정치’ ‘노동 없는 부’ 와 함께 ‘희생 없는 종교’를 세상을 망치는 7가지 사회적 대죄 중 하나라고 꼽았다. 정의구현사제단의 요즘 활동은 과연 희생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가. 사제단의 어떤 간부는 지난 정권 시절 이사장이니, 위원장이니 하면서 세상 권력을 누렸다.

기독교의 핵심은 사랑과 용서, 그리고 평화다. 사제단이 지금 벌이는 행동은 이 세상에 평화를 심기 위함인가, 아니면 분열과 갈등, 그리고 증오를 심기 위한 것인가. 사제단은 마치 핍박받는 의인 한 사람을 위해 대신 싸워주고 있는 듯 행동한다. 사제들의 눈에는 삼성에서 기백억을 받았던 그가 의인으로 보이는 모양이다. 사제들은 왜 폭로 대상이 된 사람들의 고통에 대해서는 사랑과 연민이 없는가. 누구든 재판을 받기 전까지는 무죄추정의 원칙에 따라 보호받을 권리가 있다. 그런데 혐의의 확인도 없이, 증거도 제시치 않고 당사자들의 이름을 낱낱이 공개하고 있다. 성직자는 법을 안 지켜도 되는가. 과거사 규명이 그렇듯이 진실을 규명하기 위해서는 정치가 개입돼서는 안 된다. 진실은 정치적 목적이 개입되면 왜곡된다. 그런데 사제단은 왜 꼭 선거를 앞두고서 기획폭로를 하는 것일까. 과연 정치적 목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까.

근대국가의 출현과 더불어 종교와 정치는 분리됐다. 이 세상 일은 국가가, 하늘의 일은 종교가 맡았다. 물론 종교가 현실문제를 완전히 외면할 수는 없다. 현실정치가 참을 수 없는 한계에 이르렀을 때 종교는 희생을 무릅쓰고 나서는 것이다. 단 힘없는 사람, 고통받는 사람, 압제 당하는 사람을 위해서 말이다. 기독교가 일제 때 3·1운동에 참여한 것도, 유신 때 정의구현사제단이 나선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그렇다면 지금 한국은 사제단이 나서지 않으면 정의가 구현되지 않을 정도로 억압의 나라, 불의의 나라인가. 나는 그렇게 보지 않는다. 이 나라는 50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산업화와 민주화를 이뤄낸 칭찬받는 나라다.

시대가 바뀌었다. 사제들이 눈에 핏발을 세워가며 정의를 외치지 않아도, 우리가 쌓아 온 민주 제도로서 나라를 운영할 수준은 되었다. 사제단은 이 나라의 제도와 법을 믿고 모든 증거를 특검에 보내 수사에 협조하는 것이 나라를 위한 길이다. 이제 사제들은 땅의 정의에 대한 관심보다는 하늘의 평화를 알려주는 사도의 역할에 더 충실해야 한다. ‘정의구현’ 사제단이 ‘평화구현’ 사제단으로 변화할 날을 기다려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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